오늘은 조영래변호사 이야기를 정리해보겠습니다. 조영래변호사의 자녀와 조영래 변호사 가족 정보를 정리하기도 합니다. 2004년 4월 13일 신문기사 내용입니다. 서울대 법대는 2004년 4월 13일 인권변호사이자 ‘전태일 평전’의 저자인 고 조영래(趙英來) 변호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조영래 기념홀’을 헌정하기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법대는 "후학들에게 공익과 인권에 헌신하는 법률가 모델을 부각시키는 의미에서 학생열람실을 재단장해 조영래 기념홀을 헌정하기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법대는 19일 낮 12시 헌정식을 갖고 기념홀을 개관할 예정입니다. 기념홀에는 열람실과 자료실이 들어서고 조 변호사 관련 기록과 그의 원고도 전시됩니다. 법대 안경환(安京煥) 학장은 "조 변호사는 70년대 학생운동 노동운동에 헌신한 민주주의자로서, 80년대 공익변론·인권변론의 선구적 길을 제시한 인권 변호사로서, 정법회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을 개척한 재야정신의 표상으로서 서울대 신입생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법률가"라고 헌정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조영래변호사
조영래변호사는 남대문 합동법류사무소를 열어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던 위인입니다. 2004년도에는 자랑스러운 서울법대인 6인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조영래변호사의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변론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기를 삼가지 않으면 안되게 된 이 사람, 온 국민이 그 이름은 모르는 채 성만으로 알고 있는 이름 없는 유명 인사, 이 처녀는 누구인가. 그녀는 무엇을 하였는가. 그 때문에 어떤 일을 당하였으며 지금까지 당하고 있는가. 국가가, 사회가, 우리들이 그녀에게 무엇을 하였으며 지금도 하고 있는가."
1986년 11월21일 인천지법 법정에서 변호사 조영래는 떨리는 목소리로 변론 요지를 낭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권인숙 사건의 변호인단 199명을 대표해 며칠간 밤을 새워 쓴 글이었습니다. 흰 한복 수의를 입은 피고인석의 권인숙도, 변호인석의 변호인들도, 방청석의 민가협 어머니들도 모두 함께 울었습니다. 그날 검찰은 그녀에게 징역 3년을 구형했습니다. 그녀가 저지른 범죄는 정녕 무엇이었던가.
85년 봄, 서울대 의류학과 4학년 권인숙은 경기 부천시 소재 가스배출기 제조업체에 ‘허명숙’이라는 친지의 이름으로 취업합니다. 이른바 위장취업입니다. 이듬해 6월4일 권인숙은 주민등록증을 위조한 혐의로 경기 부천경찰서에 연행됩니다. 관련 사실을 거리낌없이 시인했으므로 그 다음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6일 새벽과 7일 심야 두번에 걸쳐 조사계 형사 문귀동은 뜻밖에도 5·3인천사태 관련자의 행방을 추궁하면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폭행과 고문을 자행했습니다. 자신의 성기를 고문의 도구로 쓰면서 뒷수갑이 채워진 저항불능 상태의 여성을 모독하고 유린하고 협박했던 것입니다.
권인숙은 극한적인 수치심과 절망감에 몸을 떨었습니다. 며칠간 고통의 나락에서 허우적거리던 권인숙은 드디어 다시는 이 땅에 추악한 공권력으로부터 희생당하는 여성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에 중대 결심을 하기에 이릅니다. 조영래·홍성우·이상수 등 변호사들이 접견을 하러 찾아왔습니다. 권인숙은 젊은 미혼 여성으로서의 수치심과 앞으로 받게 될지 모를 엄청난 수난을 각오해야 했습니다.
공권력의 추악한 타락상은 조영래 등이 작성한 고발장에 의해 삽시간에 전국에 알려졌다(그녀는 사건 진상이 외부에 알려진 뒤에도 아주 오랫동안 이름 없이 ‘권양’으로만 불렸다). 7월3일 권인숙은 문귀동을 고소하면서 진상 규명을 요구했지만, 바로 이날 그녀는 공·사문서 위조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됩니다. 문귀동은 이를 틈타 곧바로 명예훼손과 무고 혐의로 권인숙을 맞고소했습니다.
뒤늦게 수사에 나선 검찰은 7월16일 수사결과 발표에서 권인숙이 성적불량자, 가출자이며 급진좌경 사상에 물들어 ‘혁명을 위해 성적 수치심까지 이용’하는 거짓말쟁이라고 매도했습니다. 아울러 고소·고발장에 나타난 문귀동의 혐의는 인정되지 않아 기소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당국의 보도지침에 따라 각 신문의 1면은 ‘성적 모욕 없었고 폭언·폭행만 있었다’라는 내용으로 채워졌습니다.
이에 변호인단은 "권양의 모든 주장은 단 한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다. 이 전대미문의 만행의 진상이 백일하에 공개되고 그 관련자들이 남김없이 의법처단되기 전까지는 이 나라의 모든 국민과 산천초목까지도 결코 잠잠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비장하게 선언했습니다.
한편 야당과 재야가 연대해 결성한 ‘고문 및 용공조작 공동대책위원회’는 토요일인 7월19일 오후 2시 명동성당에서 ‘고문·성고문·용공조작 범국민폭로대회’를 개최했습니다. 명동은 경찰과 집회 참가자들 사이의 격렬한 몸싸움과 자욱한 최루탄 연기에 휩싸였습니다. 7월27일 서울 성공회 집회를 시작으로 청주·이리(익산)·부산·대전·광주로 이어졌습니다.
8월25일 대한변협은 문귀동에 대한 검찰의 불기소 결정에 대해 변호사 166명으로 재정신청 대리인단을 구성하고 법원에 재정신청을 냅니다. 이 재정신청을 심리한 서울고법은 10월31일 ‘이유없다’며 기각했습니다.
기각 결정문은 스스로 모순되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고발장의 범죄내용 대부분을 인정했지만, ‘문귀동이 손으로 그녀의 음부를 만지고 자신의 성기를 꺼내 그녀의 음부에 대어 수회 비비는 등 추행하였다’라는 권인숙의 진술은 목격한 증인이 없으므로 인정할 수 없고, 따라서 문귀동에 대한 검찰의 기소유예는 정당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조영래 등은 재정신청 사건과는 별개로 9월1일 권인숙의 변호를 위해 199명의 변호인단을 구성하고 법정에서 진실을 가릴 준비에 임합니다. 12월1일 인천지법은 권인숙에게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합니다. 이날 선고가 끝나자 부천경찰서 성고문공동대책위는 "싸움은 이제부터다. 성을 도구화한 자들은 운동권이 아니라 군사독재와 그 하수인임이 드러났다"며 방청객과 함께 어용 재판부를 향해 격렬하게 항의했습니다.
87년 2월 항소심 법정에서 분노는 폭발했습니다. 민가협 회원 이중주(민정당사 점거사건로 구속된 서울대생 이기정의 어머니)는 재판장이 권인숙의 진술을 도중에 막는 것을 보고 격분, "성고문 범죄자를 비호하고 피해자를 재판하는 게 사법부냐"고 고성으로 항의했습니다. 법원 정리에게 끌려나가던 중 그녀는 교도관의 모자를 벗겨 재판부를 향해 던지며 외쳤습니다. "이 더러운 군사독재의 시녀들아."
이틀 후 그녀는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됐습니다. 신성한 법정을 모독한 죄였습니다. 구치소에 입감되는 순간, 그녀는 외쳤습니다. "우리 딸들, 여기 있느냐. 이 엄마가 너희 곁으로 왔다. 권인숙 재판부 하고 싸우다 들어왔다. 엄마가 왔으니 같이 더욱 힘내서 싸우자." 복도 양쪽 방에서 함성과 환영의 박수가 터져나왔습니다.
"이 재판은 거꾸로 된 재판입니다. 여기에 묶여서 재판받아야 할 이는 이 연약하고 순결무구한 처녀가 아니라 인간의 탈을 쓰고 차마 저지를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른, 법질서와 인권과 인륜도덕을 그 근본에까지 남김없이 유린하고 우리로 하여금 인간성에 대한 마지막 신뢰까지 지닐 수 없게 만든 극악극흉한 문귀동 그 사람입니다. 권양은 우리에게 ‘진실에의 비밀은 용기뿐’이라는 교훈을 온몸으로 가르쳐 주었습니다."(변론 요지서)
대법원은 6월 항쟁 이후인 88년 2월9일 끝내 재정신청을 받아들였고, 문귀동은 89년 6월 사건 발생 3년 만에 징역 5년의 중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은 22살 처녀가 폭력적인 정치권력과 정면으로 대결해 결국 승리한 사건이었습니다. 군사정권의 총체적 부도덕과 인권유린의 실상을 국내외에 알린 지극히 부끄러운 사건이었습니다. 권력의 수족으로 전락한 검찰과 경찰, 이들을 원격조종하는 정체불명의 공안당국, 당근에 길들여진 언론, 불의한 권력 앞에 한없이 나약한 사법부 등등의 추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이었습니다.
민족모순이 먼저냐, 계급모순이 먼저냐는 운동론으로 분열돼 있던 진보진영 역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여성문제는 격렬한 정치투쟁에 가려져 있었으나, 이 사건은 이후에 활발한 페미니즘 담론을 불러오는 계기가 됐습니다. 묻노니, 치욕스런 정권의 하수인이 된 관련자들 중에 스스로 반성한 이가 있는가.
-권인숙씨 대학서 여성학 강의-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을 폭로했던 권인숙 교수(40)는 지난해 9월부터 명지대 강단에서 여성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권교수가 1987년 가석방으로 출소 후 한때 ‘노동인권회관’ 대표간사로 활동했을 당시만해도 ‘민주화 투사’의 이미지가 늘 그를 뒤따랐습니다. 그러다가 94년에 뒤늦게 대학을 졸업하고 서른 살의 나이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여성학은 단순한 선택이라기보다는 터질 것 같은 머리를 수습하기 위한 절박한 선택이었다." 그는 2002년 펴낸 자전에세이 ‘선택’에서 노동운동가에서 여성학자로 변신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털어놨습니다. 그는 유학간 지 6년 만인 2000년 미 클라크대에서 ‘한국의 군사화된 여성의식과 문화’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런 뒤 사우스플로리다 주립대에서 재직하다 지난해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지난 4월에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의뢰로 군대 내 성폭력 실태 조사를 맡아 "사병 15.4%가 성폭력 피해를 받았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조영래변호사 자녀 조영래변호사 가족
- 배우자 이옥경(李玉卿) 아들 조일평(趙一平), 조무현(趙茂顯)
- 조카 매드클라운, 조현철